키보드

고등학교를 입학할 때 내 이름이 새겨진 멋진 펜을 선물로 받았다. 필기구를 좋아하던 그 시절, 신나하면서 나는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펜에는 압박감이 담겨있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필기해서 좋은 대학을 갔으면 좋겠다는. 대학교를 입학할 때엔 태블릿 피씨를 선물로 받았다. 전자기기를 좋아하는 나는 뛸 듯이 기뻐 모든 강의 피피티를 테블릿에 담아서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테블릿 피씨에는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열심히 수업을 듣고 필기하여 좋은 학점을 받기를 원하는. 대학원을 들어갈 시기가 되자 키보드를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나는 좋아해도 되는걸까. 이 키보드엔 어떤 감정이 담겨있을까.

관구

넌 혼자 뭐 이렇게 좋은걸 쓰냐? 연구실 선배가 과제를 도와주러 내 자리에 왔다가 키보드를 쳐보더니 핀잔을 줬다. 제가 고른건 아니고, 담당 선배가 맞춰주셨어요. 변명하듯 대답했다. 그때는 나 역시 의문이었다. 연구실 예산이 남는다며 담당 선배가 구매해준 이 비싼 키보드. 기계식 키보드가 저소음이라 해봤자 얼마나 조용하길래, 그리고 백라이트는 도대체 왜 필요한거지? 사치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마다하지 않았을 뿐이다. 1년이 지난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어이없는 일이 있을 때 마다 손 끝에 힘을 실어 분노의 카톡을 보낼 때도 저소음 키보드는 부드럽고 조용하게 타격을 받아준다. 이내 숨을 쉬듯 잔잔하게 깜박이는 백라이트로 나의 심란한 마음을 달래준다. 이젠 연구실 선배보다 이 키보드가 더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서우

지쳤을 때, 키보드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편할 것 같아서. 단순히 눌리기만 하는 것 같잖아. 하지만 키보드가 되기도 어렵더라. 저래보여도 키보드는 발전하고 있는걸. 나와 디지털 세상을 잇는 창구. 세상과 맞추기 위해 꾸준히, 계속해서 노력한다. 벌써 키보드 전용 포트는 옛말이다. 무선 연결이 필요하면 블루투스 기능을, 휴대폰이라면 천지인을 사용한다. 심지어 내 취향에 맞춰 색다른 키감을 원하면 축을 바꾼다. 어휴. 어렵다.

예준

키보드를 두드린 지 이십 년, 타이핑은 이제 생각을 거칠 필요도 없다. 왼손 검지는 F, 오른손 검지는 J. 양손 열 손가락을 숨쉬듯이 움직이면 글자가 날숨처럼 나온다. 그러던 어느 날, 누가 나를 보더니 오른손은 검지밖에 안 쓴다고 얘기해 준다. 말이 귀에 들어오지만, 그 뜻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이야기랑 똑같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정말 굳이 반박까지 해야 하나? 다시 한 번 눈앞에서 숨쉬듯이 화면에 글자를 찍어나간다. 그런데 내 오른손은 오직 검지만 움직이고 있다. 눈을 몇 번을 깜박여 봐도, 내 오른손에서 움직이는 것은 단 하나의 손가락뿐이다. 갑자기, 내 이십 년간의 타이핑이 와르르 무너진다. 숨쉬던 것마저 갑자기 멎어버리는 기분이다. 이제는 순식간에 귀까지 빨개진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내가 있다.

정호

One of my favorite features of the QWERTY keyboard is that it has two ridges on F and J keys. It makes localization of other letters and typing much faster. It is interesting how finding the right keys is done almost subconsciously without any effort. I am sure that it would definitely be a bit more difficult if this design choice had not been made. As a real example of its usefulness, let me write about my laptop keyboard. It has English and Korean layouts but does not have Russian one, however, it still is easy for me to locate Russian letters and type quickly, once again thanks to the ridges and my memory of the layout. However, since my typing speed is still not 120 words per minute, the design should be improved.

Arnur

When I was a child and still learning to write, I used to break the lead and spend considerable time sharpening my pencil. Rest of the time, I was busy using my eraser to correct the mistakes I made with my pencil. I felt tedious and bored and wondered why there are no easier ways to learn writing. I often asked my class teacher, Miss Helen, why we were taught handwriting with a pencil and a paper. Surprised with my questions, she used to say that learning this way is easy and natural. Moreover, she used to say "in future, there will be an easier way to write using technologies." Later, when I was a freshman and started using computers, writing using a keyboard felt more difficult to me as key combinations were not easy to perceive. However, as I practiced more and used the autocorrect options, it gradually became easy to use it.

Bellay

예전에는 한동안 펜보다 연필을 고집했었다. 지우개는 짝꿍처럼 따라다니고. 근데 어느날부턴가 부드럽고 따뜻한 색의 연하고 번지는 연필보다, 선명하고 뚜렷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펜이 써보고 싶어졌다. 실수를 하더라도 그 부분을 시원한 two straight lines로 찍찍웠 그어버리고 당당히 다음 글자들을 대수롭지 않게 이어 써내려가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고 부러웠나 보다. 쉽진 않았지만 펜으로 쓰는 연습을 하던 중, 키보드를 만나게 됐다.  키보드는 모양을 바꾸는 것이 너무 쉬워져 버려서 펜으로 글을 쓰던 연습이 쏙 다시 들어가버렸다. 그 키보드의 유연한 특성 때문에 사람들이 더 쉽게 도전을 할수 있고, 몇번이고 계속 고쳐나가고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반면에 펜으로 글을 쓸때에는 도전적이어야 했는데, 키보드가 생겨난 이후로는 그렇지 않게 됐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에게 맘을 담은 편지를 쓸때에는 키보드보다는 펜이 더 좋다.

Michelle

헤지지 않는 종이에는 꾹꾹 눌러 쓴 글도 활자다. 망치로 때리고 담금질을 해도 활자는 활자다. 그 금속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토록 빨리 식는지, 별안간에 죽어버린 활자를 더듬으며 글을 지을 때면 손에도 마음에도 피가 맺히고 얼어 쪼개졌다. 상처투성이 손끝에는 골무라도 만들어 씌운다지만, 마음으로부터 활자로 흐르는 피는 언제까지나 굳지 아니하리다. 나는 악을 쓰고 깨어 있으며 더듬는 활자 하나마다 마음을 저며내는 냉기를 견디리다.

Seongwoong

내 책상 한 가운데 자리잡은 키보드. 수많은 키가 있지만 그 중 백스페이스 키가 유독 닳아있다. 이녀석은 그간 내 머릿 속에서 나온 오만가지 생각들을 잡아먹었다. 일단 떠오르는 말을 타이핑 했다가, 다시 백스페이스로 지우고, 다시 쓰고, 다시 지우고 ... 의 반복이다.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백스페이스가 지나간 내 글을 보여준다. 현실 속에는 백스페이스 키가 없다. 내 입에서 이미 나와 누군가의 귓속으로 들어가버린 말들은 지워버릴 수가 없다. 감정에 치우쳐서 쉽게 뱉은 말이 오해를 만들고, 갈등을 빚는다. 현실에서 나의 백스페이스 키는 ‘다시 생각해보는 것’ 이다. 나는 기계가 아니다. 말 한마디에 짜증이 날 수도 있고, 예민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에 휩싸여서 순간적인 감정을 담아서 바로 말해버리면, 갈등의 골은 메우기 어려울 정도로 깊어지기 마련이어서 서로 고생하게 된다. 항상 뱉고 나서 생각해보면 더 좋게 말할 수 있었던 방법이 떠오른다. 이러면 ‘처음부터 이렇게 말할걸..’ 하고 후회하는 것의 반복이다. 머릿 속에 백스페이스 키를 달고, 입을 열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Youchan